제주 4·3 잃어버린 무등이왓 마을 - 제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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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잃어버린 무등이왓 마을 - 제주여행  


 

4·3 제주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 있는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을 찾았다.

 

 

 

 

 

 

무등이왓 마을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신화역사로 586번길 입니다.

 

 

무등이왓마을 소개

동광리5개 부락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서 130여 호가 있었다. 국영목장인 7소장이 있어서 말총을 쉽게 구할수가 있고,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등을 만들던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주산지였다. 강귀봉 우영팟의 최초학살터와 잠복학살터 등이 있는대 그날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지금은 사라진 초가집 울담따라 아직도 대나무가 많아 오순도순 살았던 당시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정경이 그려진다.

 

 

 

 

무등이왓은 1948년11월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지금까지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다. 이곳은 약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주민들은 주로 목축과 조, 메밀, 콩 등을 재배하며 살았다. 교육열이 높아 일제시기인 1939년에 2제인 동광간이학교가 건립됐는데, 감산리에 있었던 안덕공립보통학교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 유일의 교육기관이어서 창천, 서광, 덕수, 상천 등지에서는 물론 중문면 색달리에서도 학생들이 취학했다. 4·3사건 당시 마을이 불타버리자, 주민들은 도너리오름 앞쪽의 큰넓궤에 숨어드는 것을 시작으로 눈 덮인 벌판을 해매다 유명을 달리했다. 4·3사건으로 무등이왓에서 희생자는 100여명에 이른다.

 

 

무등이왓마을 최초학살터

1948년 11월 15일 광평리에서 무장대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온 토벌대들이 동광리에 들이 닥쳤다. 토벌대는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주민 10여 명을 호명하여 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하였는데 덜 맞아 육신이 온전했던 사람은 도망을 쳤고 나머지는 모두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지금은 텅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왠지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무등이왓의 중심지에는 광신사숙이라는 사학이 있었던 자리가 있다. 지금은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광신사숙

1930년에 설립된 동광리개량서당인 광신사숙이 있던 자리이다. 학생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배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이후 동광간이 학교로 개편되어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으로 김봉춘, 이두옥 씨가 있었다. 

 

 

 

무등이왓마을 옛 공고판

먀을의 추곡수매나 대·소사 혹은 여러가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 공고를 붙였던 자리이다. 일제 때는 가혹한 수탈의 공출을 알리는 공고가 있었고 4·3 바로 전 해에는 식민지 치하에서 겪었던 강탈이나 다름없는 '보리공출'을 알리는 공고가 붙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공고판을 들여다보면 당시 마을 사람들의 순한 눈빛이 보일 듯 하다.

 

무등이왓마을 옛 공고판에서 오른쪽으로 500m 향하면 잠복학살터 가는 길이다.

 

 

 

 

 

잠복학살터 가는길에 눈에 띈 고목!! (4·3 당시에도 저 모습 그대로 있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무상함 만큼이나 고목의 모습이 처량하게 보였다. 어쩌면 희생자의 영혼이 한이 맺혀 꽃이나 잎이 피지 못하고 고목이 된 것이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복학살터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는 자신들이 전날 학살한 양민들을 일가에서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으로 예상하고 전술훈련을 하듯 잠복해 있었다. 토벌대는 김두백 등 일가족 10여 명을 한곳으로 몰이하여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물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울부짖는 고통 속에 화염에 휩싸여 죽어간 이들은 대다수 여성, 노인,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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